* * *
"......."
노엘을 바라봤을 때, 나는 이상한 감정에 휘몰아쳤다. 그래, 이건 바로...
'동질감.'
속아왔던 사람은 나 하나뿐이었을까? 태어날 때부터 전대 백작의 힘을 전승 받기 위해 조종되던 그녀의 삶은? 그리고 그녀는 왜 나를 선택했을까? 어째서, 하필 나였을까. 원망과 함께 그녀의 삶 또한 집사와 주변인들로 인해서 조작되었을 확률이 높았다.
'씨발...'
빗소리는 거칠게 내리고, 떨어지는 물방울들 사이로 새어나오는 정적은, 절정 속에 관중들이 숨소리마저 아끼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죽기 전에 이유라도 알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해야할까, 아니면 그녀를 보며 내가 느끼는 이 빌어먹을 동정심과 동질감을 가지고 무슨 말을 꺼내야 할까.
'스릉!'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노엘과 나는 그저 눈물만이 흘러나오고 있었고, 그녀는 내게 검을 세우며 자세를 취한다.
'빌어먹게...아름답네.'
그녀의 검에서 새어나오는 남색 빛무리는 그녀를 감싸고 있었고, 나는 그런 그녀가 애달파 보여 참을 수 없었다.
"미안."
나는 짧게 읊조렸다. 수 많은 원망과 수 많은 동정심, 그리고 수 많은 안타까운 현실에 포기하려 할 때쯤, 부드럽게 그녀가 내게 다가온다. 저 검에 베여지면 난 끝나는 것이리라.
"니들 뜻대로 해줄 생각은 하나도 없어서."
웃기지 말라고 해라. 이 미친 연극에 놀아나는 것은 모를 때로 충분하다. 노엘은 그들이 만든 최고의 피조물이자 예술품이라고 해도. 세공된 마스터 피스만이 남은 아름다운 조각이라고 해도. 부수고 조각내고 망가트려진다고 그걸 아쉬워하라고? 모든 관중들이 침을 뱉는다고 해도 살아남을 것이다. 이 빌어먹을 무대 연극 위에서 빠져나오는 것이 내 최고의 답례일 뿐.
'탓!'
구름 다리 밑, 저택의 낮은 층 지붕 위로 떨어진다.
'파칵!'
저택의 윗 지붕에 장식해놓은 돌 타일들 위로 내 구두가 내리쳐지며, 몇 개가 땅으로 떨어진다.
'퍼어억!'
부서진 돌 타일들이 바닥으로 떨어지며 산산조각이 난다. 아득하리 만치 높은 지붕 위에서 나는 무릎이 살짝 아려오는 것을 참으며 달리기 시작했다.
"......."
그저, 노엘은 날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가 순식간에 날 잡을 수 있을 것 같은 여유를 부릴 때, 그 순간이 승부수 였다.
'탓!'
작은 여성의 구둣소리. 난 위를 바라본다.
"씨발!"
위에서 내려쳐지는 남색 별빛을 머금은 검.
'파카아앙!'
내가 떨어질 때보다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돌 타일들이 박살 난다. 빗겨나간 것. 그것으로 그녀가 날 죽일 마음이 없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내 이야기를 듣고 싶은 것이다.'
살려고 외치는 변명 혹은 사과, 그런 것들을 들으며 내게서 유언을 듣고 싶은 것이리라. 묘한 동질감 속 난 지금 누구보다 노엘을 이해할 수 있었다.
'스릉!'
저택의 중간 즘 위치한 지붕 위에서 노엘이 내게 검을 겨눴다. 서늘한 검의 감촉이 내 목 위로 정지되어 있었으며,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몰랐다면 나는 지금 변명이나 하며 목숨을 구걸하고 있었을 것이다.
"노엘!!!"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 난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잠시나마 시선을 분산시킨다.
'파앗!'
그녀의 주위로 비산하는 돌조각들. 돌 타일들이 박살날 때 빠르게 한 움큼 집었던 것들이었다. 살짝 머뭇거린 그녀, 확인을 할 새도 없이 나는 그대로 지붕 위에서 굴러내렸다.
'콰드드득!'
톨 타일들과 부딪치며 내 등과 어깨, 다리가 비명을 지른다. 차라리 떨어지며 속도를 내는 것이 달리는 것보다 빨랐다. 비가 내리며, 지붕은 부드럽게 날 흘러내렸고, 그대로 중간 즘 위치한 구름 다리 위로 떨어져내렸다.
'퍼억!'
큰 충격음이 터져나왔다. 최소한 지탱하려 한 오른 팔과 왼 다리가 부러지거나 금이 갔을 것이다.
"허억...허억..."
저 위의 중간 지붕에서 날 바라보고 있는 노엘. 비겁하다 할 수 있다. 그녀는 지금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궁금했고, 난 그것을 이용해서 도망칠 궁리나 하고 있었으니까.
'쿠르릉!'
다시 벼락이 내리치기 시작했다.
'찰박!'
물 웅덩이를 밟는다. 휘청이는 몸을 이끌고 서서히 나는 저택의 성벽까지 내딛고 있었다. 잠시, 다음 물 웅덩이에 비춰진 내 모습을 바라봤다.
'이게...어울리네.'
무슨 꿈을 꿨던 것일까, 살기 위해 발악했던 모든 것이 연극이었고, 나는 연극인지도 모른채 발광하던 생쥐였을 뿐일까. 아니, 마법사들이 사용한다는 실험용 쥐새끼였을 지도 모른다. 지금까지 시궁창에서 살아왔다 생각한 생쥐가 알고 보니 거대한 유리벽 안에 갇힌 이제 그 실험이 끝나 폐기될 그런 삶이었다 느끼는 것 뿐.
"하아...하아..."
철썩이는 호수의 파도를 바라본다. 비와 바람이 세차게 불어와 오늘...수영은 자제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가면 죽어."
뒤에서 들려오는 서늘한 목소리. 그러면서도 날 위한다는 그런 말에서 나는 지금 뒤에 있는 사람이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천천히 나는 몸을 돌려 뒤에 있는 사람을 환대한다.
"꽤 빨리 오셨네요."
"......."
몸을 날려, 거의 10미터에 가까운 구름 다리까지 떨어졌다. 인간이라면 절대 따라잡기 힘들 정도로 크게 내딛어 지금 팔이랑 다리마저 꺾여나갔고, 어디 제대로 찢어졌는지 하얀 와이셔츠는 빨갛게 염색약을 뿌린 듯 물들고 있었다.
"죽을 정도로...내가 싫은거니?"
오늘 비는 폭우인 모양이다. 지금까지 화창한 날씨에 질투라도 난 듯, 미친듯이 쏘아붙고 있는 빗 속에 난 착 가라앉은 그녀의 은발을 바라봤다. 저 감정선이 조금이라도 고조되었을 때 내 목은 그대로 떨어져나갈 것이다.
"그거 아세요? 당신은 지금까지 만난 사람들 중 제일 아름답고."
그녀가 듣고 싶었던 유언을 그녀의 귀에 들려준다. 그래, 이 정도면 내가 죽더라도 최소한 내 흔적이 남겠지.
"또...불쌍한 사람입니다."
천천히 그녀의 목에 손을 잡고 잡아당겼다. 그리고 노엘과 이 빌어처먹을 빗 속에서 키스를 했다.
"하아..."
하얀 살결과 그녀의 자색 눈동자, 그리고 빨간 입술. 떠나려는 남자를 붙잡고 싶다는 애절한 눈빛까지.
'그래.'
어차피 살 길이 없었다는 것. 그래도 시도라도 해본 것. 그 정도면 충분했다.
'탓!'
그대로 나는 뒷걸음질 치며 성벽 위에서 떨어져 내린다.
"아."
키스를 나눈 순간, 노엘은 느끼지도 못할 정도로 부드럽게 내 심장에 검을 꽂았던 모양이다. 찢어진 심장 사이로 세어나오는 핏줄기가 눈가에 아른 거린다.
[티르.]
사랑스럽다는 듯 웃던 그녀. 그리고 지금 성벽 위에서 날 보며 울고 있는 그녀. 그녀는 태어날 때부터 강요받은 의무감 때문일까, 혹은 나처럼 실험실의 생쥐처럼 아무 것도 모르고 살아왔던 백작가의 불쌍한 영애일까.
'모르겠네.'
그녀의 생각은 동질감이 들며 이해할 수 있었지만, 또 이해할 수 없었다. 철퍽이는 호수의 파도에 들어가기 전, 나는 문득 그녀가 궁금해졌다.
'미안.'
그리고 그런 그녀에게 아무 도움도 되지 못한다는 사실에...미안해졌다.
'파아앙!'
큰 돌이 떨어지는 소리를 내며 내 몸은 호수로 들어갔고, 코와 입, 눈, 그리고 상처가 터지며 찢어진 살결 속으로 거칠게 밀려들어오는 물이 날 잡아삼킨다. 살아있는 것처럼, 우악스럽게 호수는 날 잡아당기며 또 그 끝으로 집어넣는다. 귀를 때리던 빗소리가 멎었고, 천천히 빛이 차단되는 것처럼 조용히 눈이 감긴다. 아, 쉴 수 있다. 좀 자야겠어. 제퍼스, 내일은...좀 쉬자고. 작업도 힘들면 못한다는 말...동의할테니까.
.
조용한 정적이 이어졌고, 또 아득한 꿈을 꾸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몽롱한 감각은 기절했을 때와는 다른 이제 연극이 끝나고 모두가 나간 적막한 공기와 같은 그런 기분이었다.
'덜그럭! 덜그럭!'
난 눈을 떴다. 보이는 것은 화창한 날씨 속 빗물의 흔적이 있는 반짝이는 나뭇잎과 태양빛, 그리고 바람 불듯 날아가는 잎사귀들이었다.
"......."
풀내음이 내 콧등을 간지럽힌다. 주변에는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들리고, 내 몸을 짚단이 덮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풀썩!'
물기를 머금은 이제 거의 말라가는 짚단을 넘기고 일어났다.
"어? 일어났니?"
망아지를 몰고 있는 사람, 아니 망아지를 몰려 고삐를 쥐지도 않았으며 그저 앞에서 알 수 없는 표지가 덮어진 책을 읽는 사람. 표지를 알 수 없는 책을 보자 노엘이 생각났다.
"여긴...어디입니까?"
"이런, 난 처음 하는 말로 천국인가요?하는 질문이 나올 줄 알았는데."
"예?"
"이런 미인이 데려가는 호화로운 마차라면 그런 질문이 나올 수 있었지 않을까?"
호화로운 마차라고 하기엔, 지금 덜그럭거리는 망아지가 모는 것은 짐수레였다. 짐수레 위에 짚단을 덮고 있던 난 어떻게 된 일인지 고민해본다.
"얘. 나는 연기 안할테니까 나한테 물어봐도 돼."
그녀는 익숙한 얼굴이었다.
"마녀시군요."
저택에서 반지 사건으로 찾아왔던 그녀. 그리고 저택을 먼지가 되어 날아갔던 것까지 기억이 났다.
"그래. 어떻게 된 일인지 궁금하면 물어보라니까?"
"공짜가 아니겠죠."
"하하! 뭐라고? 넌 진짜 대단한 애라니까! 마녀 학회에 널 데려가고 싶을 정도야!"
무슨 말인지 모른채 내 뚫렸던 심장을 만져보려 했다.
"아, 급하게 접합시킨거니까 만지지마. 아직 아물지 않아서 조그마한 충격에도 푸슉하고 피가 터질 수가 있어요.그럼 또 멈춰서 접합해야 하고 귀찮아진단 말이야."
"왜 절 살리셨죠?"
마녀는 빙그레 웃는다.
"너, 지금까지 조종했던 사람들한테 복수할 생각없어?"
마녀는 악마를 신봉하며, 악마는 어느샌가 사람에게 다가와 달콤한 유혹을 한다고 한다. 급하게 주위를 둘러보니, 지금 난 알 수 없는 높은 산의 산길을 가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
얀데레 영애 episode 끝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