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아아..."
새어나오는 절망의 신음소리. 이것은 내 목소리에서 나올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과 함께 반항심이 일어나는 그런 소리였다. 적막한 빗소리 사이에서 찢어질 듯 터져나오는 신음은 내 충격을 그대로 표현하기 위한 현악기보다 더 낮은 그런 음이었다.
"......"
모두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저, 무뚝뚝한 얼굴의 나와 비슷한 나이의 사람이 날 바라보고 있다.
"모험가...가 되겠다는게..."
[소피아...10살 때부터 함께한 첫사랑이자 모험가로 떠났지. 같이 하고 싶었지만, 제대로 된 실력이 없어 도적 길드에 들어가고 난 뒤 모험을 함께 하려 목표를 세웠고.]
노엘이 해줬던 말이 생각난다. 그 때부터 지금의 집사의 말에서 얻을 수 있는 증거와 확립, 그리고 결론.
'소피아는...'
어릴 때부터 이상적으로 날 챙겨주던 어린 여자아이. 슬럼가의 두들겨 맞고 도망치는 거지 아이에게 내밀던, 호두파이. 엄마에게는 비밀이라며, 줬던 산딸기 주스까지.
"아아아!!!!"
마음이 한 켠 박살나는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무뚝뚝한 얼굴에서 나오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듯한 저 허망한 눈.
"소피아!!!"
집사도, 그리고 내 눈에 보이는 저 소피아라 생각되는 여성도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난 그녀를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숨이 막혀오고, 어질거리는 머리는 도저히 이성을 찾을 수 없다는 듯 헤매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공황장애가 생겨나는 것 같았으며 토가 쏠리고, 또...죽고 싶어졌다.
"이 아이는 당신이 먼 미래를 기약하며, 희망을 가지고 슬럼가에서 살아갈 수 있게 해준 매개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모험가라는 자유를 심어줬지만, 당신에게 실력이 없다는 반증을 알게 해주었죠."
슬럼가의 아이로서, 그리고 여자아이에게 힘도 못 쓰는 그런 나약한 나라는 사람을 인지시켰으며, 이 데커드 영지에서 성인이 되어 힘을 길러 그녀를 따라가겠다 각오를 하게 된 계기.
"이 개새끼들아!!!!"
도저히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다. 내 기억, 그리고 모든 과거가 한 순간에 박살이 나는 감정이란, 그리고 내 소중한 추억들이 전부 거짓된 다른 이가 만들어낸 산물이란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집사의 의무감 혹은 충성심도 그리고 백작가의 비운의 과거 또한 상관이 없어졌다. 그저, 눈 앞의 사람들을 바라보며 피 눈물을 흘리며 찢어죽이고, 또 내가 느낀 이 굴욕감과 절망감을 전해주고 싶어졌을 뿐이다.
"당신에겐 유감스럽지만, 만약 저희가 당신을 돕지 않았다면 슬럼가의 흔한 시체가 되어 사라졌을 것입니다."
인정한다. 소피아가 아니었다면, 그리고 만약 그들이 지금까지 내 주위에 온 선인 혹은 도움을 준 사람들이 아니었다면, 난 진작에 죽어서 사라졌을 것이다. 결론이 다르게 귀결될 뿐인 것. 그저 그렇게 슬럼가에서 죽어 나자빠질 것이냐, 대의를 위해 백작가에서 희생당할 것이냐.
"누가...누가 또 관련된 사람이냐?"
내 질문에 집사는 무심한 얼굴로 날 바라봤다.
"엘리도 궁금하십니까?"
내 눈이 크게 흔들거렸다. 소피아가 떠나고 나서, 날 잡아끌며 희망을 얻게 해준 아이. 그리고 소매치기에 대해서 제대로 가르쳐준 먹고 살 길을 제대로 알려준 그녀는 잿빛 마탑에 마법사가 데려갔다고 알고 있었다.
"그녀는 배신자입니다. 그래서 마법사를 고용해 조용히 처리했습니다. 백작가의 중요한 분께 소매치기를 전문적으로 가르치다니...하마터면 대의가 손실될 위기였죠."
"엘리는! 그럼 엘리는 무사한 거냐?!"
'쿠당탕!'
움직임이 심해지다보니, 난 묶인채로 나무의자와 함께 쓰러졌다. 그런 나를 내려다보며 집사는 입을 연다.
"말씀드릴 수 있는건, 그녀는 잿빛 마탑으로 가진 못했습니다. 누군가 마법사를 습격했고...그 아이는 납치를 당한 모양입니다. 아, 그녀의 마법적 재능은 확실히 있었으니 아마도 납치범은 마녀가 아닐까 추론 중입니다."
엘리가 했던 말들 중, 함께 슬럼가를 도망치자고 했던 말, 그리고 난 소피아를 기다려야 했기에 거절했었다. 그 다음 날 우린 잿빛 마탑의 마법사에게 걸려...엘리는 그 뒤 볼 수 없었다.
"젠장할..."
"당신은 다른 슬럼가의 아이들과는 다른 특별한 분이란걸 이제 아셨으면 좋겠군요."
"뭐가 특별한데...어차피 죽이려고 키운 새끼란 거잖아."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허나 세상에는 스스로의 몰락과, 대의를 위한 희생이라는 다른 관념적 정의가 있다는 것만 알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끅끅대며 난 웃기 시작했다. 비루하고 비참하게, 그리고 가끔 희망을 가지며 포기하지 않았다. 그저 평소처럼, 아니 앞으로 나아가려고 살아왔다. 그런데 그게 전부 조작되어 있었고, 난 내가 아닌 대체 무엇이었단 말인가?
"저희의 오류점은 당신을 너무 쉽게 봤다는 점입니다. 당신은 저희의 생각을 넘어선 꽤나 총명한 아이였습니다."
마치 어린 제자를 키운 스승처럼 말하는 집사.
"좋게 말씀드리자면, 제 기술을 가르친 엘리가 잡기술이긴 하지만 도적 기술을 당신에게 가르쳤으니 당신은 제 손제자...사손이 되는 셈이군요."
"좆까."
내 입에서 슬럼가의 거친 말이 내뱉어졌다.
"어떤 병신 스승이 지 제자가 잘못을 범했다고 남에게 팔아치워."
"당신이 들어가고 싶어했던 도적 길드는...그런 일들이 비일비재한 셈인데, 뭐 직업적으로 선배이자 사승으로서 말씀드립니다."
'툭!'
그가 하얀 장갑을 들어올렸을 때, 내 모든 포박이 벗겨져 나갔다.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난 그를 바라봤다.
"이제 대의는 당신의 오늘 행동으로서 클라이맥스로 다다르고 있다는 것을요."
"뭐?"
잠깐 눈 앞의 소피아가 살짝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그녀 또한 백작가의 첩자이자, 내가 기다리던 어른스러운 아이. 이유없이 날 챙겨주며, 의지를 하게 만들어줬던...그리고 사랑을 느끼던 더럽고 비루한 아이가 꿈꾸던 이상의 동반자. 그런 그녀는 다시 아무 움직임 없이 날 다시 바라본다.
"당신이 아마 제일 위험하다 생각했던 노엘님은 지금 어떤 결론에 도달하고 계실까요? 사무엘 데커드 님처럼 본래의 이성관이 아닌, 저주의 마법으로 어릴 때부터 사랑과 집착, 그리고 살인에 대해서 다른 이들과는 다른 사고방식을 가지신 그 분이...지금 당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겠습니까?"
왜 그가 날 풀어줬는지 이해하게 되었다. 도망쳐봐라, 노엘은 그런 나를 더욱 증오하며 사랑하게 될 것이다. 결국 난 그녀의 손에 죽게 될 것이니.
"이제 곧, 저희 측의 정보가 전달되었으니 이 성으로 돌아오시겠군요."
내 소매에는 숨겨놓았던 단도 따윈 전부 사라져있었다. 그저, 마치 사람이 죽을 때 해주는 눈 자위 위에 올려두던 은화 두 개마냥 놓인 훔쳤던 목걸이와 반지들이 있을 뿐.
"지금까지 수고하셨습니다. 티르님."
그가 서서히 사라진다.
"아, 소피아님과 남은 하실 말씀이 있으시면 하셔도 됩니다. 짧게나마 강간을 하셔도 되고, 어떻게 폭행하시거나 살인을 하셔도 괜찮습니다. 강간을 하시게 된다면 아마, 노엘님께서는 완전한 전승을 이루실 듯 하니, 대의를 위해선 그 부분을 추천드립니다. 아, 당신은 선택하지 않겠지만 자살을 하셔도 괜찮습니다. 시체를 보더라도 전승은 이뤄지게 될 것이니까요."
어차피 노엘이 돌아오면 죽는다. 나는 사라지는 집사를 뒤로 하고 무뚝뚝하게 서 있는 소피아를 바라봤다.
"내 삶을 이렇게 만든 것은 네 의지야?...내가...내가 영지 밖으로 나갈 꿈과 함께 머물도록 한게 네 의지냐고?"
소피아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는다. 옷가게의 마네킹처럼, 그저 날 바라보며 아무 행동도 취하지 않을 뿐이었다. 혹시나 날 유혹시킬 미끼로 쓰기 위해서일까, 그녀의 복장은 내가 상상했던 모험가의 복장과 그리 다를 바가 없었다. 레더아머에 모험가용 긴 부츠, 그리고 허리에 찬 검과 등에 찬 방패까지. 내가 혹시나 모험가 길드 혹은 상단을 연결해 도망쳤다면...아마 그들은 소피아를 이용해 날 꼬드겼을 것이다.
"대답해!!!!"
터져나오는 고통의 비명과 함께 난 그녀에게 강요한다. 대답이 필요했다. 수렁에 빠진 사람이, 혹은 물에 빠진 사람이 닷줄을 달라는 듯 휘적이는 것마냥 나는 그녀의 어깨를 잡고 소리친다. 비는 요란하게 내리고 있었으며, 곧 노엘이 다가오는 것도 신경쓰지 않고 있었다. 그저 그녀의 대답만을 원할 뿐이었다.
"예. 제 의지였습니다."
그녀의 입에서 오랜만에 듣고 싶었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그녀는 날 바라보며 환대적인 웃음이나, 전에 보여줬던 재잘거리던 모습. 혹은 날 위로해주던 부드러운 손길조차 없는 그런 눈빛이었다.
"씨발년아!!!!!"
크게 소리를 지를 수 밖에 없었다. 이 거지같은 감정을 터트리지 않고는 못 배기는 느낌. 그녀에게 주먹을 쥐어 휘두르려 하지만, 천천히 주먹을 내린다. 그녀는 내 주먹에도 그리고 분노에도 아무 감정없이 바라만 보고 있었으니까.
"개씨발같은 세상이네."
곧 죽게 될 것이다. 난 소피아에게서 멀어진다. 마셨던 독한 럼주에 취했던 것일까, 아니면 솥에서 끓고 있던 스프에 녹여진 수면제가 강했던 탓일까. 헛구역질이 몰려오며 다리가 휘청거렸다.
'내가...어떤 방식을 취해도 죽을 것을...계산했다.'
그러니, 죽기 전에 그가 왜 죽어야 하는지를 마지막 동정심으로 설명해준 집사에게 더러운 감사를 표한다. 침을 뱉어주고 욕을 해주며 그의 볼에 입맞춤 대신 주먹을 선물해주고 싶은 감사였지만, 난 그곳에서 절박하게나마 또 다시 희망을 품을 수 있었다.
'그래, 뒤지는 것을 생각해서 파티를 열어준 셈이지.'
내 장례식은 유난히 떠들석하게 빗소리와 함께 이뤄지고, 세상에는 별 것 아닌 백작가에서 하인 하나가 죽은 사실로 공표될 것이다. 그저 한 명이 죽는다. 사육 당하고 지배 당하며, 희망을 헛되어 심어주고 나가지 못하는 절망을 기다림으로 바꾼 오케스트라마냥 클라이맥스로 다다른 이 엿같은 세상을 위해 난 충분히 배우로서 반항해줄 것이다.
"내가 어떻게든 살아남길 바란다면 날 막지마."
소피아는 그저 날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저, 그녀에게 위안을 얻고 싶어하는 이 엿같은 조종당한 세상에게...또 한 번 의지하고 싶어진 것이다. 사실 집사를 찾으며 다리를 부여잡고 살려달라고 엉엉 울고도 싶다. 하지만 집사는 날 보며 총명하다고 말했다.
'확률 상 이뤄지지 않는 일은 하지 않는 것이 좋지.'
'끼이익!'
열려있는 지하 창고. 널리 보이는 백작가의 저택과 성벽, 그리고 기다란 호수의 다리가 보인다. 호수는 비가 오며 범람하고 수영을 하기엔 썩 좋지 않은 상황임을 짐작한다.
'그리고 내 유일한 살 길이지.'
저 넓은 호수에 빠져죽던, 노엘에게 죽던 매한가지. 난 한 가지 결심을 할 수 밖에 없었다. 밖으로 나가는 것이 아니다, 나는 천천히 저택의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허억...허억!..."
높은 계단을 푹 젖은 의복을 입은 채 철벅거리며 달린다. 아무도 있지 않는 어두운 저택의 계단은 높았고, 또 그 뒤로 이어진 구름 다리 같은 다리에 다다랐을 때 느끼게 되었다. 이곳 만이 내가 도망칠 수 있는 곳임을 말이다.
'여기가...'
성벽으로 이어진 거대한 구름 다리. 이 길이 내 살 길로 연결되는 곳일까 하는 의문. 집사는 이 활로를 남겨준 이유가 무엇일까. 내가 예상하지 못했다고? 아니, 그는 오히려 내가 총명하다는 것을 믿기 때문에 내가 이곳으로 올 것임을 예측하고 있었을 것이리라. 비가 돌 다리 위에서 웅덩이를 만들어내며, 땅으로 떨어진다. 아득하리 만치 높은 다리 위에서 나는 천천히 앞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또각! 또각!'
구둣소리가 내 귓가에 울려퍼진다. 요란한 빗소리에도 난 항상 귀 기울였기 때문일까, 익숙한 정교한듯 일정한 걸음걸이가 내 귀에 들려왔다.
"노엘..."
울음자국이 가득한 아름다운 영애. 비에 젖은 채로도 빛나는 은발과 아름다운 자색 눈동자가 눈에 띈다. 하얀 피부는 빗방울을 흘리며 마치 물의 정령인 것처럼 청아해 보였고, 옷은 살결이 보일 정도로 몸에 붙어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눈은...그 어느 때보다 텅 비어있는 것 같았다. 돌 다리 위에서 그녀는 빤히 날 바라보고 있었다.
"왜...도망치니?"
그녀의 손에는 데커드 백작가의 표식이 적혀있는, 최고의 검이라는 칭호를 달 사람이 쥘 수 있는 검이 들려있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