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달그락! 달그락!'
귓가에 거친 자갈 길을 굴러가는 바퀴의 소음이 들려온다.
"잘 가고 있는 것 같네?"
창문 밖을 바라보니, 점점 익숙해지는 배경이 눈에 띈다.
"어..."
"티르. 일단 집에 들려서 필요한 걸 가지고 나와야 하지 않겠니?"
어제, 정신없이 노엘에게 끌려와 데커드 백작가의 하인이 되었다. 그렇기에 나는 그녀의 말에 친절함과 함께, 섬뜩함을 느꼈다.
"네..."
백작가의 정보력일까? 어떻게? 내 이름 티르 두 글자 외에 그녀는 아는 것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슬럼가의 사람들의 성격을 생각해보면, 절대 외지 사람에게 근처의 정보를 잘 누설하지 않는다는 장점이 있다. 그것이 지금까지 소매치기로 살아오면서 무사할 수 있었던 이유.
'내 집 위치까지 드러났다. 그 말은...'
내가 지금까지 소매치기로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주머니를 털었는지 대략적으로 드러날 수 도 있다. 이곳은 백작가의 영지. 그렇기에 나는...
'범죄자.'
노엘의 입장에선 언제 교수대 혹은 감옥에 가둬도 이상하지 않을 그런 전과가 가득한 죄수. 그렇기에 나는 지금 마차가 가는 길이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아니라, 죽음의 강을 건너는 나룻배 같은 기분이 들었다.
"자, 도착한 모양이야."
정말 도착했다. 이 근방에 내가 살던 곳이 존재했기에, 난 숨길래야 숨길 수 없다는 것을 인지했고, 천천히 떨리는 손을 숨기며 마차의 문을 열었다.
"안내해주렴."
하얀 실크 드레스의 그녀. 절대 이 슬럼가촌에 어울리지 않는 그런 복장이었다.
"바닥이...더럽습니다."
그녀의 고급진 단화가 더러워질까 걱정이 들었다. 슬럼가촌은 타일이 있는 것도, 정돈된 것도 아닌 언제나 쓸려갈 수 있는 무른 흙더미로 된 길이었으니까.
"그러네."
상관이 없다는 듯한 웃음. 난 그녀의 손을 잡고 마차에서 내리는 걸 도와주었다. 그런데.
"손을...놓아주시길 바랍니다."
손을 빼려고 하는데, 그녀가 손을 놔주질 않았다. 힘을 주면 실례일까 싶어 천천히 그녀에게 말을 건넸다.
"에스코트인데 안내해줘야 하지 않겠니?"
"아...예."
원래 제대로 된 예법을 배운 적이 없던 난, 레이디를 초행길에 안내할 땐 손을 잡아줘야 한다는건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의 작은 손이 내 하인이 되었을 때 받은 하얀 장갑과 닿자 나도 모르게 볼이 빨개졌다.
"좀 많이 더럽습니다."
길은 퀘퀘한 기분이 들었으며, 뭐가 버려졌던 것인지 모를 얼룩진 곳들이 잔뜩 보였다. 언제 어디서 나올 지 모르는 도둑고양이 혹은 노숙자와 거렁뱅이들. 술취한 취객이 술 냄새를 풍기며 나타날 수 도 있으며, 돈을 노리고 접근하는 슬럼가의 자칭 자경단 놈들이 올 수도 있다.
"호위는 없으십니까?"
"응?"
기특하다는 듯한 눈빛.
"아니...이런 곳은 노엘님에겐 꽤 위험합니다. 언제 뭐가 나타날 지 모르고 또..."
저 같은 소매치기가 있을 수 있지 않습니까?라는 말을 꺼내려다 멈췄다.
"티르, 네가 날 지켜주면 되잖니?"
내 한 몸 건사하기 힘든 곳이 이 곳이었다. 이 슬럼가에서 살아날 수 있는 방법은 거의 세 가지라고 볼 수 있다. 패거리가 많던지, 아니면 위험해보이던지 혹은 가진게 아무 것도 없어 보이던지. 나는 믿음직한 놈이 아니라고 피력하고 싶었지만, 손을 잡은 레이디가 있어서일까, 괜한 오기가 부려졌다.
"가시죠."
처음으로 여성을 내 집에 초대하는 기분. 뭔가 얼떨떨한 기분은 뒤로 하고, 백작가의 아가씨가 이런 위험한 동네에 하얀 실크 드레스를 입고 왔다란 꽤 위험군에 속하는 표적이 될 가능성이 높았다.
'물론...나 보단 강하지만.'
한 번에 날 들어 엎어트린 것은 노엘이 분명했다. 하지만, 나 같은 도적 길드도 못 들어가는 평범한 소매치기 정돈 누구나 제압할 수 있을 수준.
'과신하시는건가.'
"뭘 그렇게 빤히 바라보니?"
"아, 아닙니다."
아무리 백작가에서 호신술을 연마했고 나 쯤이야 제압한다 쳐도, 이 슬럼가에서 쪽수로 밀어붙이는 패거리 녀석들과 만나면 꽤 곤란한 상황이 올 것이다. 허리춤에 몰래 숨겨둔 단검이 잘 있는지 생각하며 길을 틀었다.
'여기서...'
그 나마 슬럼가의 큰 대로변이라 할 수 있는 곳에서 잘 다니지 않을 것 같은 샛길. 그 쪽을 돌아, 판자촌의 거리를 지나며 안으로 들어간다.
"노엘님께서 보시기엔 꽤나...더러울 수 있습니다."
"창피하니?"
그녀가 옆에서 속삭이는 소리에 부끄러운 볼을 차마 숨기지 못했다.
"예..."
잘 정돈되어 있지 않을 집. 그렇기에 머뭇거리지만, 그녀는 차분히 내 손을 잡아 날 잡아끈다.
'진짜 내 집을?'
정말 이 정도로 백작가의 정보력이 강한걸까? 하는 기분이 들었다. 서슴치 않게 집의 문을 열고 들어오는 그녀. 문이라 할 수 없을 정도로 삭은 판자더미 같은 것을 옆으로 치우며, 둘은 안으로 들어왔다.
"부끄럽네요..."
단촐한 환경. 옆엔 짚을 쌓은 뒤 모포로 덮은 간이 침대와, 탁자로 쓸 다 부서진 고물 서랍장, 그리고 몇몇 가지 음식들이 담긴 바구니와 물병, 짐을 놔둘 허름한 가방 몇 개가 전부였다.
"처음으로 집에 초대해줬네?"
"예?"
처음으로? 지금까지 그녀는 날 본 적이 있다는 이야기라는 말이 되는데...나는 어제부터 계속 고민해봤지만 그녀를 절대 본 적이 없었다. 그녀가 날 기억하지 못하냐는 첫 만남 때부터 지금까지. 애초에 고귀한 영애와 내가 가까운 교류를 했을 리가 없지 않은가?
'집까지 초대할 정도로 친한 사이도 아닐 것이고...'
노엘은 생각에 빠진 내 눈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기뻐라."
"자,잠시만요! 영애님!"
천천히 그녀가 내 목에 양 팔을 감싸안는다.
"노엘."
살짝 볼을 부풀린 듯한 얼굴.
"노,노엘님..."
"그래, 왜?"
"너무 가깝습니다!"
뒷걸음질을 치려고 하지만, 이미 그녀의 팔이 내 목을 감싸쥐었기 때문에, 뒤로 갔다간 엎어질 가능성이 있었다. 천천히 그녀의 팔을 떼려 그녀의 양팔꿈치를 잡았다.
"티르."
"네,네?"
얼굴이 전부 빨갛게 변한 난 그녀의 물음에 겨우 대답했다.
"팔이 아니라 허리를 잡아야지."
"노엘님! 아,아니 그게..."
빨갛게 변한 내 볼에 그녀의 입술 감촉이 닿았다.
"......"
"더?"
참을 수 없다는 듯한 그녀의 숨소리와 함께 가빠지는 심장 박동소리.
"잠시만요!"
어떻게든 빠르게 몸을 놀려 짐더미로 향한다.
"채,챙겨야죠. 오늘 제 짐을 챙기러 온 날이지 않습니까?"
빨리 가방들을 열어젖히며, 내용물을 확인해본다. 챙길 것은 그리 없었지만, 더 있다간 정신이 어떻게 되버릴 것 같아 급하게 가방을 들어 짐들을 쏟아넣었다.
"그래."
작게 기회는 많으니까라는 말이 들렸지만, 애써 무시하기로 한다. 사람 놀리는 것에 도가 큰 것 같은 그녀.
"가,가는게 좋을 것 같습니다."
가방엔 내 집에 몰래 숨겨놓은 은화 2개와 동화 11개, 직업 상 관리를 잘 해줘야 하는 아주 작은 단도 몇 자루. 응급상황 때 쓸 몇 가지 아이템들이 전부였다.
"그래."
웃는 그녀는 다시 손을 내밀었다. 돌아가는 길은 이미 알고 있으면서...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녀를 거부할 능력은 없었기에 다시 손을 잡았다.
"근처에 먹을만한 곳은 있어?"
"여긴 그리 좋은 점심이나 디저트 가게는 없습니다. 마차로 간 뒤, 시내거리로 가시는게 좋을 듯 합니다."
"자주 가던 제과점은?"
"......."
대체 어디까지 날 수색한 것일까? 제과점...그러니까 그곳 소피아 어머님이 운영하시는 가게. 어릴 때부터 친했던 소피아는 모험가가 되기 위해 여행을 떠났었다. 난 자주 놀았던 소피아의 어머님께서 홀로 운영하시는 제과점에 자주 들렀었고, 당연하다는 듯한 노엘의 물음에 추리를 해보았다.
'소피아 어머니께서 내가 사는 곳을 알려줬을까?'
그녀 또한 내가 정확히 어디에 사는지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단골인 그가 대충 어느 방향으로 가는지 정도는 알고 있을 수 있기에, 그녀가 내 집의 단서를 내준 유력한 용의자가 될 수 있다.
'아니야, 아주머니는 그럴만한 분이 아니니까...'
고개를 젓다가, 노엘을 힐끔 바라봤다. 알 수 없는 듯한 웃음은 내 눈빛을 읽는 것 같았고, 여러번 동공이 흔들리다 이내 입을 열었다.
"딱히 좋은 가게는 아닌데..."
간판도 없는 허름한 동네의 제과점일 뿐이다.
"...그 년이 떠났으니까, 뭐 상관없어."
"네?"
다시 넘어가라는 듯한 입웃음.
"이 쪽으로..."
난 그녀의 손을 잡고 다시 허름한 슬럼가의 길을 걷고 있었다. 마차와는 전혀 다른 반대편의 길에다 시내와는 동떨어진 거리이기에 긴장할 수 밖에 없어졌다.
'만약 문제가 생긴다면 노엘님을 지킬 수 있을까...'
불안한 감정이 스쳐지나갈 때, 노엘이 잠깐 발걸음을 멈췄다.
"노엘님?"
"응?"
그녀의 알 수 없는 행동에 난 잠시 그녀를 바라봤다. 곧...
"어어! 이게 누구야!!!"
한 사람의 외침과 함께, 난 뭔가 잘못 걸렸음을 알게 되었다.
"노엘님!"
손을 잡아 끌고 빨리 이 슬럼가를 빠져나가야 했다. 허나, 빠른 발걸음 소리와 함께, 근처에서 우당탕 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젠장할!"
앞이든 뒤든, 전부 포위하는 것이 이 쪽 슬럼가 녀석들의 특징이다.
"티르, 맞지? 야 새끼 많이 컸네?"
'씨발.'
제일 걸리고 싶지 않은 녀석들에게 걸리고 말았다. 이 슬럼가를 주름 잡는 자칭 자경단 새끼들. 자경단이라고 하며 보호비를 강제로 거두며, 깡패짓이란 깡패짓과 백작가 근처 잡다한 개같은 짓들을 마다하지 않는 놈들. 녀석들의 통칭 '바스타드'. 한 마디로 개자식들이란 뜻이다.
'바스타드 새끼들...'
허리 근처에 손을 올린다. 단도가 쥐어지지만, 이것은 대부분 소매치기를 할 때 주머니를 째기 위한 수준의 작은 단도일 뿐. 사람을 위협하기에는 좋은 무기가 되지 못한다.
'혼자였다면...'
양 옆 담벼락을 넘어 어떻게든 도망쳤을 것이다. 허나, 노엘이 낀 상황.
"노엘님, 제 옆으로..."
앞과 뒤는 녀석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꽉 틀어막고 있다. 어쩔 수 없이 그녀를 뒤로 물리지 못하고, 옆에 있게 할 수 없단 곤란함과 불안함이 맴돈다.
"이 새끼 이거, 지금까지 잘 살았지?"
"...그래."
"그런데 꼴이 그게 뭐야? 어디 종놈으로 들어간거야?"
하인 복장을 한 티르. 그리 눈에 띄지 않는 얼굴이라 생각했지만, 복장을 바꿔입어도 금방 알아채는 놈들을 보니 은근히 개성있는 얼굴이었나하는 생각도 든다.
'도적이 적성에 안 맞았을지도 모르겠네.'
"그럼 오랜만에 본 수고로운 일들을 해주는 자경단에게 감사를 표해야겠지?"
티르는 가방을 꺼내, 손을 넣었다. 그리고.
'탱그랑!'
바닥에 쏟아지는 동전들. 아까 집에서 챙겨온 은화 두 개와 동화 11개가 바닥에 떨어지며 마찰음을 내었고, 난 신경질적으로 소리를 질렀다.
"그게 전부다. 가지고 꺼져."
"오오! 티르 이 새끼 부자였잖아?!"
"은화를 두 개나? 이야, 씨발 지금까지 도망만 다니길래 뭐 있긴 한갑다 했긴 했었어!"
주섬주섬 주워드는 녀석들.
"그런데 가지고 있는거 더 있잖아?"
"......"
나무 몽둥이를 가지고 겨누는 개자식들 중 하나. 그가 가리킨 것은 바로 노엘이었다.
"그 아가씨."
"니 새끼들이 건드릴 수 있는 분이 아니다."
"그렇다면 이야기가 더 빠르지. 돈값이 되실 분이란 뜻이니까."
은화 2개 가지고도 넘어가기 힘든 상황. 보통 은화 1개는 고사하고 동화 3개 정도만 줘도 좋다고 넘어가는 녀석들이 끈덕지다. 오랜만에 미녀를 본 야수처럼, 그들은 애초에 표적이 노엘이었던 것이다.
"니들이 무사할 수 있을 것 같아?"
"납치를 전문적으로 해주시는 형님들이 있거든. 그 분들에게 가져다 바치면 우리도 수고비를 받을 수 있지. 즉, 우린 그 형님들에게 넘기고 아무 문제도 없을거란 말이지. 물론..."
제일 앞에 나선 녀석이 비아냥대며 말을 이었다.
"너만 다물어주신다면 말이야."
슬럼가에서 그 말은 '뒤져라'라는 말이 된다. 납치범들에게 노엘을 넘기고 바스타드의 대략적인 행선지를 알 수 있는 날 죽인다. 한 두번 이런 일을 해본게 아닌 모양.
'씨발...'
품 속의 단도를 몰래 소맷자락에 넣었다. 덤벼들게 된다면 여차할 때 녀석들과 싸울 요량이었다.
"뭐해? 일 들어가자."
"야, 몸 값 떨어지니 잡히기 전까지는 건드리지 마."
"그래야지. 넘겨주기 전에 맛만 좀 질펀하게 보다가 넘겨주자고."
낄낄 거리는 녀석들. 슬럼가의 하이에나, 도시 속의 개새끼들. 속으로 욕을 하며, 천천히 다가오는 녀석들을 향해 팔을 조심스럽게 뻗었다.
"이 좆만한 새끼!"
한 녀석이 몽둥이를 크게 들고 달려든다. 빠르게 몸을 틀어 녀석의 크게 든 팔꿈치를 잡고 목에 소맷자락의 칼을 겨누려 했다. 인질을 삼을 셈.
'푹!'
그런데, 내 팔에 뭔가 힘이 더 들어갔다. 누군가가 밀어준 것처럼.
"어억..."
경동맥에 확실히 찔린 바스타드의 개새끼 한 명이 눈을 뒤집으며 쓰러진다.
"......."
모두가 경직된 상황. 피를 길게 흘리면서 뽑혀나온 단도. 나는 경직된 채로 멈춰서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오늘은...내 첫 살인의 날이었다.
"흐음."
그리고 내가 볼 수 없는 곳에서 만족스럽다는 콧노래를 부르는 그녀가 있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