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자 같이 먹자. 배고팠지?"
대부분의 하인들은 식사시간이 되면, 집사가 내어준 일과에 맞춰 삼삼오오 식당에서 밥을 먹는다고 한다. 삼 일이 되도록 나는 식당에는 가본 적이 없었다. 그저, 지금까지 먹은 것은...
'꽤 굶었네.'
노엘의 옆에서 먹은 스테이크 한 조각, 그리고 홍차 한 모금과 집사에게서 얻은 비스킷이 전부.
'그렇다면...'
노엘은 내가 그녀와 같이 식사를 하길 바라는 것이다. 제대로 된 식사를 하지 못했으니, 내 배는 어떤 음식이든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었다.
'굶어서 참지 못하고 밥을 같이 먹을 때까지...놔둔건가.'
슬럼가 생활 속 밥 굶은 적이 많던 난 어느 정도 최소 음식만 주면 어떻게든 버틸 수 있는 위장을 지녔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까지 어떻게든 버텨온 것이지, 남들이었다면 지금 노엘이 들려준 포크 위의 연어를 게걸스럽게 먹어치웠을 것이다.
'방법이 없어.'
집사가 몰래 비스킷과 과일을 나눠준 것이 바로, 그가 말했던 몰래 용인해준 상황. 아마 노엘의 명으로 인해, 이 저택에서 식사를 할 수 있는 기회는 그녀와 앉아있는 지금...식사하는 자리 뿐이었다.
"노엘님."
"응?"
"제가 하인입니다. 수고스러운 일은 그만두시길 바랍니다."
난 차분히 그녀의 손을 잡고, 포크를 건네받았다.
"그럼, 티르 네가 먹여줄래?"
이 상황은 가정해둔 적이 없었다. 차분히 연어를 입에 넣은 뒤, 나이프로 겨우 썰어 그녀에게 내민다.
"맛있어."
"다행입니다."
식사를 하지 않고 거리를 벌리고 싶었지만, 이 몹쓸 배는 이제 한계라는 듯 음식을 달라고 떼를 쓰고 있었다.
'빌어먹을...'
표정은 한결 같이 덤덤하게. 그러면서 연어를 썰며 급해지는 내 손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빠르게 나이프를 놀린다.
'아.'
백작가의 전문 셰프가 만든 연어구이는 황홀할 정도로, 그리고 빌어먹을 정도로 맛있었다. 겉을 바삭하게 익혀 식감이 살아났으며, 속살은 부드러운 구워지지 않은 살과 같아 침샘을 자극한다. 씹을 때 겉면의 살짝 질긴, 그러면서 구워지며 나는 구이의 향내와 함께 간이 된 짭조름한 맛이 내 혀를 감돌았다.
"...드시죠."
더 게걸스럽게 연어구이에 머리를 박은채 입 안으로 집어넣고 싶었지만, 눈 앞에 날 바라보는 저 무서운 분께 다시 연어를 올려드렸다.
"흐음. 이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연어인 것 같아."
"셰프가 이번에 꽤나 힘을 줬나봅니다."
"바보."
개구쟁이처럼 웃는 그녀. 또 불안한 감각이 올라온다.
"네가 줘서 그런거야."
이미 알고 있었지만, 굳이 인정하기 싫은 말이 나왔다.
"가,감사합니다."
너무 딱딱하게 있으면 의심을 살 수 있다. 나는 현재 하인이자 죄수의 신세이지만, 그들에게서 벗어날 노력하는 연기자. 최대한 불안하며 눈치를 보는 모습으로 조심스럽게 연어를 썰었다.
"잔도 따라줘."
화이트 와인. 마개는 이번에도 열려있었다. 어떤 기술을 쓴 것인지는 모르지만, 그녀만 있으면 와인이 들어간 사교계에선 최고의 찬사를 받을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또르륵!'
와인을 따르며, 그녀의 눈치를 살핀다. 내가 이곳을 빠져나갈 궁리를 하는 것을 눈치채지 못한 모양.
'안심시켜야 해.'
노엘은 흐뭇한 얼굴로 날 지긋이 바라만 보고 있다.
"아, 먼저...마실까요?"
끄덕이는 그녀. 난 조심스럽게 화이트 와인을 들고 입에 머금었다.
'독이 들었을리가...'
잠깐만 생각해봐도 이곳으로 오는 모든 것들은 집사와 하인들이 엄격하게 관리하고 있을텐데...게다가 호수 위의 감옥같은 큰 저택이라 암살자 같은 것들이 올 수도 없는 곳이었다. 가끔 지나가다 봤던 것이 생각난 것인데, 이런 성으로 향하는 물건들은 병사들과 하인들의 깐깐한 검수를 통해 들여온다.
'틈이 없겠지.'
마차에 몰래 들어가 노엘이 먹을 만한 술에 독을 타고 운에 맡기는 암살자가 있지 않는 이상 불가능한 조건이다.
'그리고.'
이 무지막지한 괴물은 독으로도 죽지 않을 것 같았다.
"문제 없습니다. 노엘님."
"맛있니?"
달콤한 화이트 와인의 맛은 긴장했던 내 마음을 녹여주긴 충분한 고급 와인이었다.
"네. 맛있습니다."
"한 모금 더 마셔볼래?"
난 순순히 화이트 와인을 잔에 따라 입에 머금었다. 그 순간, 언제 왔는지 모를 그녀의 입술이 내 입술과 닿았다.
'쨍그랑!'
손에 쥐고 있던 잔이 바닥에 떨어져 시끄러운 소음을 내고, 그녀의 혀가 내 입으로 들어와 천천히 내 입 안에 있던 화이트 와인을 부드럽게 약탈해 갔다.
"흐음, 맛있네?"
베시시 웃는 그녀. 얼 타는 얼굴로 난 그녀를 바라봤다. 벌써 몇 번이나 그녀에게 입술을 빼앗겼는지 모르겠다.
"그런데 어쩌지? 이제 잔이 없는데...나는 이 와인을 즐기고 싶어."
노엘에게 '병나발이나 부십시오'라고 할 수도 없는 상황. 기지를 발휘해야 한다.
"이,일단 떨어진 잔을 치우도록 하겠습니다."
"나중에."
그녀의 말에 반항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그저 테이블 용 의자에 앉아 불안한 얼굴로 그녀의 명을 기다린다.
"내 잔."
손가락으로 내 입술을 누르는 그녀.
"자."
언제 들려있는지 그녀가 화이트 와인병을 들고 내 입에 술을 넣는다. 알싸한 술내음과 함께 달콤한 그 액체가 안으로 들어오고, 또 다시 그녀가 내 입 안을 유린하며 혀로 화이트 와인을 맛보기 시작했다.
'아...'
또 정신이 몽롱해진다. 정신을 차려야 했지만 술기운과 함께 노엘의 입맞춤, 그리고 혀에서 느껴지는 작은 돌기들이 날 미치게 만든다. 쾌락이자 탐욕 그리고 수렁 같은 기분이 내 몸을 무겁게 만들고 있었다.
'덜컹!'
의자가 넘어가고, 난 그대로 쓰러졌다. 이미 내 위에 올라탄 노엘은 웃으며 천천히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겼다.
"티르♡"
지금까지 그녀가 내 이름을 부른 횟수가 얼마나 될까 궁금해졌다. 부드러운 그녀의 얼굴이 내 품에 뭍히고 천천히 숨을 내쉬기 시작한 그녀.
"사랑해."
그녀의 사랑놀이에 어울리고 싶은 마음이 없었지만...술 기운 때문일까 점점 그녀에게 손이 가려던 것을 애써 참았다. 나 또한 남자이기에 이런 아름다운 여성이 끊임없이 달려들면 곤란한 생각까지 이어진다.
"응?"
그녀의 물음은, 이제 포기하고 함께 하자라는 듯한 구애의 눈길이었다. 지금까지 괴물 같았던 그녀의 눈이, 마치 여자 아이가 원하는 물건을 보고 어떻게든 가지려고 떼를 쓰는 그런 눈 같았다.
"노엘님..."
차분히 내 마음을 진정시킨 후 입을 열었다.
"응."
"저녁 시간이 한창입니다. 식사를 마저 하시지요."
"난 괜찮은데..."
"제가 배가 고파서 그렇습니다. 지금까지 제대로 뭘 못 먹었거든요."
"정말?"
모른 척 하는 것일까, 정말 몰랐을까. 진짜 몰랐다면 내가 지금까지 밥을 못 먹은 것은 집사가 배후일 확률이 높아진다.
'그렇다면...'
지금 날 가두는 근원은 노엘 뿐만 아니라 집사도 원흉이 된다는 뜻이 된다. 물론 내가 그녀의 저녁을 내어주고, 그대로 나온다면 식당으로 안내해줄 수도 있을 집사지만...그들의 원하는 바에 맞춰 움직여주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네. 여기 와서 배울 것도 많고 그래서 밥이 잘 생각나질 않더군요. 그래서 3일 동안 먹은게 없어 좀 어지럽습니다."
"아,안되지! 앉아!"
처음으로 그녀가 당황한 얼굴을 보았다.
'이거다.'
여기서 힌트를 얻었다. 내가 생존 혹은 생활에 곤란한 것을 느낄 때...그녀는 내 편이 되어 어떻게든 요구조건을 들어주는 것이다.
"예. 그럼 실례를 무릅쓰고..."
천천히 비켜준 그녀 옆으로 일어나 의자를 세우고 그 위로 앉았다. 와인 병은 저기 나동그라졌으며, 아깝게 술을 콸콸 흘리고 있었지만...주울 마음은 들지 않았다.
'또 키스를 할 수 있으니...'
다시 아까와 같은 상황이 반복될 수 있었다. 포크와 나이프를 들고 천천히 연어를 썬다. 그리고 그녀를 보는데.
"나는 괜찮아. 티르. 빨리 먹어."
당황이 가시지 않은 그녀의 얼굴. 새삼, 그녀가 귀여워 보였다. 큰 괴물이 내가 혹시나 잘못 될까봐 불안해하는데, 자신이 나서면 터질까 안절부절하는 것 같다는 느낌. 내 목 언저리 밖에 오지 않는 여성이었지만 그녀는 거대해보였고, 또 그런 그녀가 어쩔 줄 몰라하니 오묘한 감정이 샘솟는다.
'젠장할...'
연어 구이는 내가 짐승이라면 짐승을 다룰, 달콤한 사료처럼 맛이 훌룡했다.
"배고팠나 보구나..."
미안하단 그녀의 얼굴. 허나, 내가 이곳에 있다간 굶어죽겠으니 내보내줘요하고 강짜를 부리는 순간, 다시 깊은 수렁 같은 눈으로 변할 것이다.
"괜찮습니다. 슬럼가에선 일주일 정돈 물 배를 채우고 사는게 기본 생존조건이니까요."
"그래서 말랐구나."
내 뺨을 어루만지는 그녀. 식사를 하는 것은 방해하지 않겠다는 듯 조심스럽게 볼을 만지거나, 턱, 귀를 만진다.
"헤에...티르..."
"...노엘님..."
"왜?"
혹시나 체했거나, 음식이 입맛이 맞지 않나 싶어 놀라는 듯한 그녀의 얼굴.
"실례지만 와인은 이미 쏟아버렸고...목을 축일게 없으니 내려가서 물을 가져와도 될런지요?"
"아, 목 막히니?"
급히 그녀가 일어난다.
"노엘님! 제가 하인입니다!"
"기다려!"
바람이 한 번 불 때쯤 이미 그녀는 사라지고 없었다.
"아니 무슨..."
예전에 봤던 엄청나게 빠른 노루 녀석보다 훨씬 빠르다. 굻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숲으로 사냥을 나갔다가 만난 녀석. 오늘의 저녁으로 삼기 위해 열심히 발을 놀렸지만 날 놀리는 듯 주위를 알짱거리며 분노를 일으켰던 녀석이 생각난다.
"여기."
부끄럽다는 듯 볼이 빨개진 그녀가 내민 물병과 잔.
"감사합니다..."
멍하니 그것을 받아들었는데 그녀가 물 잔에 물을 따라주었다. 그러면서, 3분의 2 정도 사라진 연어구이를 힐끔 바라본다.
"이 정도 가지곤 부족하지? 앞으론 배가 고프다고 확실히 말해줘. 집사에게 2인분을 준비하라고 하면 알아들을거야."
그녀는 나와 같이 식사를 하는 것이 기정사실화 되어있는 모양.
'퇴로가 없군...없어.'
노엘의 속력은 감히 내가 따라갈 수 없을 정도의 실력이었다. 와인 사교계의 스페셜 리스트 뿐만 아니라, 만약 그녀와 소매치기 동업을 하게 된다면 세상 털지 못하는 것은 없을 것 같은 그런 느낌이 들었다.
'빠르고, 강하며, 끈질기다.'
가볍게 그녀의 특징을 나열해봤다. 어지간한 탈출 방법은 무리. 계산을 마친 후 천천히 목을 축인다. 그 뒤, 물잔을 내려놓고 그녀에게 한 쪽 무릎을 꿇었다.
"어?"
"노엘님. 전 노엘님의 하인입니다."
"...응."
"하인이 필요한 것을 주인이 가져다 주는 것은 오히려 저에겐 의무불이행에 업무태만이 될 수 있습니다. 노엘님께서 원하신다고 해도 주인과 하인은 나뉘어야 하는 격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티르..."
"노엘님께선 필요한 것을 말씀해주시지요. 전 그것을 가져오겠습니다."
괜찮은 멘트였다. 만약 그녀가 내가 필요하단 것을 전부 자신의 힘과 백작령으로 들어준다면, 나는 그저 이 새장 안에 영원히 가둬진 새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니, 하인으로서 나는 널 위해 움직일 것이다라는 명분을 꼭 가져야 했다. 그래야...
'노엘님을 위해서 뭘 구하러 간다는 변명이 가능하다.'
이 성에 가둬진채로...그녀가 모든 것을 들어주게 된다면 내가 밖으로 도주할 때, 의심이란 의심을 전부 받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병사들이나 기사들한테 다리를 지나기도 전에 붙잡혀, 하인이 아닌 철창 속에 가둬진 죄수처럼 길러지게 될 것이 분명했다.
"그러면..."
노엘의 대답.
"하인이 아니라 내 남편이 되면 되잖아?"
당연하지 않느냐는 듯한 질문.
"노,노엘님!"
턱 막히는 완전무결한 해답이 나와버렸다. 물론 내 입장에서는 전혀 틀려버린 완벽한 오답이었지만.
"왜?"
"저는 그저 슬럼가에서 지내는 빈민에 지나지 않습니다! 노엘님은 데커드 백작가의 영애시지 않습니까?"
"그러니, 내가 원하는 남자와 결혼할 수 있는 것이지."
보통 백작가의 영애는 그럴 수 없다. 정략혼으로 오랜 기간 교류를 해오는 다른 귀족들과 두터운 인맥을 공고히 하기 위한 소재로 사용될 뿐.
'아.'
지금까지 왔던 5명의 귀족가의 자제들이 목이 썰려나갔다는 사실. 그런 그녀를 데려가고 싶어할 귀족가는 없을 것이다. 그녀가 원하기 전까지는, 그리고 그녀가 원하는 사람은.
'바로 나...'
데커드 백작가의 알 수 없는 영애. 그녀의 부모님조차 그녀에게 어떤 것을 강요하지 못한다. 현 백작은 그녀에게 타박이나 명을 내리지 않으며, 노엘이 원하는 것을 아픈 몸을 이끌고라도 구해주는 사람. 엘리자는 그녀를 힘들어했고, 커틀이란 그녀의 남동생은 아예 얼굴도 비추지 못할 정도로 그녀를 무서워했다.
'그녀가 원한다면...'
난 충분히 백작가의 데릴사위로 들어올 수 있게 된다. 신분상승의 꿈일 것 같은 이야기. 허나...
'영원히 갇힌...'
그리고 허다하게 손목이나 몸이 꺾이는 삶.
"...부끄럽네."
서서히 다가오는 그녀의 손길. 부끄러워하며 내 볼을 만지고 서서히 키스를 나누려 입술을 가져온다. 내 고개는 천천히 내려가고 그녀와 입맞춤을 하게 된다. 이것은...
'혼인의 서약?!'
결혼을 말했고 말 없이 키스를 나눈다. 그럼 이게 무엇이겠는가. 나는 있는 머리, 없는 머리를 굴려 변명을 생각해내야만 했다.
"모,모험가!!!"
"어?"
생각이 난 것은 소피아였다. 현재 모험가로 살고 있을 그녀.
"예! 전 옛날부터 모험가를 꿈꿔왔습니다. 바람처럼 자유로운 그런 삶! 끝없는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는 것을 동경했고, 소매치기로 삶을 전전했지만 이 가슴 속에는 아직도 그 꿈이 남아있습니다!"
가쁜 숨 소리를 숨기며 외쳤다. 그렇기에 그녀와 결혼을 하게 된다면 난 곤란해지는 것이다라는 것을 피력했다. 노엘은 내가 곤란해지는 것을 싫어한다. 그러므로...
"안돼."
"네?"
"안돼...내꺼야...드디어...내 것이 되었는데...빠져나간다고? 내게서? 왜? 어째서? 잘해줬는데...아니...손목을 부러트린 건 네가 잘못한거 잖아? 응? 왜 그래?...왜?"
잘못...건드렸다. 그녀의 눈이 점점 옅어져가고 난 조금씩 뒷걸음을 쳤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