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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2 - Chapter 12: Yandere Youngae 12

* * *

"왔구나!"

하인복을 입고 난 후, 그녀가 말했던 연무장으로 걸어 갔다. 무거운 발걸음 속, 내 구둣소리는 뚜벅거렸고 오후가 될 즈음인 지금 시간의 날씨는 화창하기만 했다. 노엘, 그녀가 날 보자마자 크게 손을 흔든다. 평소의 드레스 차림이 아닌, 셔링이 특징인 멋으로 주름 진 와이셔츠와, 다리 라인이 살아나는 검정 면바지, 그리고 가죽 샌들을 신은 그녀. 드레스 차림이 단아해보였다면, 지금의 노엘은 노블리스 오블리제에 나올 것 같은 책임감 있는 아름다운 귀족 같은 품격이 느껴졌다.

"네, 헌데 무슨 일이십니까?"

더 다가오려는 그녀를 손으로 살짝 막는 제스쳐를 취하며 제지한 뒤, 물었다. 잠시 뾰루퉁해진 그녀가 다시 표정을 풀며 말한다.

"흐음, 어제 했던 말 기억나지 않나보네?"

많은 생각들이 뒤섞여, 노엘이 했던 말이 잘 기억나질 않았다. 조금씩 생각을 정리해본다.

'얼마나 강한지 보여준다고 하셨지.'

그렇기 때문에 적합한 장소가 바로 연무장일 것이다.

'강한 여검사.'

노엘은 분명 내 이상형이 강한 여검사라고 말했으며, 그녀는 그것에 충족되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다른 기사들과 병사들의 훈련을 하는 기합 소리가 들려온다.

"하압!"

"하!"

그들의 주인인 노엘이 있기 때문일까, 목이 터져라 고함을 지르며 기합이 잔뜩 들어간 얼굴들로 훈련에 임하는 모습들이 보인다.

"자, 우린 저기로 가자. 배고프지?"

노엘은 직접 연무장의 구석으로 날 안내했고, 그곳에는 피크닉 가방과 함께 꽃 무늬로 장식된 매트가 깔려 있었다. 앉으라는 그녀의 말에 잠시 매트를 만져보니, 잘 알지 못하는 재질인 듯 꺼슬리는 감각이 손에 잡힌다.

"네."

순순히 나는 그녀의 옆 자리에 앉았고, 피크닉 가방에서 과일 주스와 샌드위치를 꺼내드는 그녀.

"자. 아."

아라는 말을 길게 늘이며 샌드위치를 내게 먹여주려는 노엘. 천천히 입을 열어 그녀가 내미는 샌드위치를 물었다.

'햄샌드위치인가.'

염지처리가 된 햄과 상추, 그리고 짭조름한 소스와 식빵의 부드러운 맛까지 입 안에 맴돌았다. 아삭거리는 상추는 별로 내 입맛에 좋지 않은 그저 풀 같은 느낌이었지만, 햄의 짭잘한 맛을 어느 정도 해갈시켜주며 천천히 씹혀져 나갔다.

"그리고."

그녀가 따라주는 잔을 바라본다. 별로 놀랍지도 않는 것, 내가 예전부터 좋아했던 익숙한 주스가 나왔다. 붉은 색깔에 알갱이와 작은 씨앗들이 그것이 무엇인지 가늠하게 해준다.

"산딸기 주스네요?"

슬럼가에선 봄이 되면 산딸기 나무를 찾아 영지의 구석을 뒤지거나, 아예 영지 밖으로 나가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몬스터들이나 산적, 그리고 위험한 모험가들이 즐비한 영외였지만,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것은 서서히 죽어가며 느끼는 굶주림이리라. 꺼져가는 목숨을 걸고 영외로 나가 산 딸기를 체취할 때가 생각났다.

'그 뒤로 좋아하게 됐지.'

썩 좋은 기억은 아니지만, 굶어가며 앙상한 손가락을 놀리며 따내서 입에 넣었던 산딸기의 맛이 새록새록 했다. 내 기억을 알고 있을까? 아니, 소매치기를 하면서도 간간히 돈이 생기면 즐기기 위해 먹었던 것이 제과점의 샌드위치나 산딸기 주스였다. 제퍼스의 말이 생각났다.

[산딸기보다 더 달콤한 주스들도 많은데 왜 그것만 고집해?]

더 싸고 당분이 많은 종류의 블루베리 주스나, 체리 주스도 있는데 항상 같은 돈을 내고 시기만 했던 산딸기 주스를 먹었던 시절. 배를 그 나마 든든히 채워준다는 호밀 주스나 견과류를 갈아 만든 주스들 또한 거들떠 보지 않고 산딸기 주스를 마셨다.

[먹다보면 어떻게든 살아남고 싶다는 기억이 새록새록 해지거든.]

[뭔 소리래.]

그리고 제퍼스는 내가 산딸기 주스를 주로 즐긴다는 정보를 노엘에게 전달했을 것이다.

"난 티르에 대해 모르는게 없으니까."

그렇겠지. 4년 동안 첩보원을 투입시켰다면, 나에 대해서 빠삭하게 아는 경지에 올랐을 것이다. 소름이 끼쳤지만 그녀의 잔을 받아들고 천천히 산딸기 주스를 음미한다. 꺼슬거리는 작은 씨앗들과 피로를 녹여주는 신 맛, 그리고 그 사이 속 숨어있듯 나오는 단 맛이 입을 맴돈다.

"감사히 잘 먹었습니다."

그저 노엘은 날 바라보며 웃고만 있었다. 이대로 있어도 좋다는 듯, 아니 비관적으로 생각을 할 수 있지만...지금 내 상황에선 그녀가 내게 점수를 매긴다고 생각했다. 마음에 드는 짓을 했을 때 플러스, 마음에 들지 않을 때 마이너스. 만약 말 한 마디가 감점이라고 친다면 100점 기준으로 120점 정도 되서 오버 마이너스 테스트가 되버리는게 문제였지만 말이다.

'어지간한 말들은 받아준다는 것이 희망요인이지.'

마이너스가 될 만한 포인트만 집지 않으면 그녀의 눈은 대부분은 '기특해'혹은 '사랑해'로 가득찬 눈이었다. 그녀를 빤히 바라봤다.

"왜,왜?"

벌건 대낮에서부터 같이 소풍을 나온 듯 연무장에 그늘에 앉온 두 사람. 빤히 바라보는 날 보며 그녀는 홍조를 피어낸다. 잠시 그녀에 대한 원망을 집어넣었다.

"보여주실게 있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응!"

바로 개구쟁이 표정. 내 개인적인 점수로 매기자면, 입술을 뜯는 버릇이 무서움 80점이라면 개구쟁이 표정이 150점 정도 되는 무서움이었다. 화는 차라리 결과를 예상할 수라도 있지, 무슨 일을 벌일지 모른다는 공포가 기어오르는 그런 느낌.

"여기, 버클 좀 가져다줄래?"

둘만 있었다 생각했었다. 그런데 어느샌가 한 하녀가 다가와 노엘에게 소드용 버클러와 검집에 걸린 은빛 검을 가져다준다.

'아차.'

하녀를 바라봐선 안된다. 의도적으로 최대한 눈을 부릅뜨며 노엘만을 바라본다.

"고마워."

대체로 그녀는 기분이 좋아보이는 표정을 지녔다. 은발에 보랏빛 눈, 하얀 살결을 제외하면 표정만 봤을 때 소풍 온 요조숙녀 같은 그런 분위기를 풍긴다. 웃는 노엘인데도, 하녀는 있는 힘껏 고개를 숙인 후 도망치듯 자리를 빠져나간다.

'그런데 저 하녀는 노엘의 말을 어떻게 들은거지? 주위에 아무도 없었던 것 같은데...'

모호한 기분이 들었다.

'스릉!'

그녀의 손에서 마치 레이피어처럼 검신이 아주 얇은 은빛 검이 뽑아져 나온다. 소매치기의 버릇 탓일까. 나는 검의 키용에 있는 장식에 박힌 '데커드'란 글귀를 읽을 수 있었다.

'데커드 백작가의 검인가?'

보통 가문의 후계에게 계승된다는 가내의 가보 쯤 되는 물건이라 생각이 들었다. 가짜가 있을 수 있겠으나, 노엘이 그런 모조품을 들고 다닐 위치는 아니며...소매치기를 전전하며 눈대중으로 값이 나갈 것을 판단하던 버릇이 또 도지게 되었다.

'저건 진짜 데커드 백작가의 검이 맞아.'

지금까지 알게 된 정보와 규합해보면...저 은빛의 검은 데커드 백작가의 전대 가주. 즉, 전쟁 영웅이자 집사가 처음으로 모셨던 주인의 검이란 뜻이다.

'휘잉!'

땅에 검끝 즉, 포인트를 끌던 그녀가 재밌다는 듯 검을 가볍게 휘둘러본다. 언제 착용했는지 허리와 왼 쪽 허벅지에 차는 버클러가 그녀의 다리에 착용되어 있었고, 그녀는 드레스 차림의 영애에서 검술을 즐기는 노블 소더가 된 것 같았다. 휘둘러지는 검에서 흘러나오는 바람으로 흩날리는 그녀의 은발.

'꽤 힘들텐데.'

긴 그녀의 은발은 검을 휘두르기엔 부적합한 것 같았다. 상관없다는 듯 고개를 흔들어 머리카락을 넘긴 후 서서히 그녀가 움직인다.

'이건...'

검에 아무 관련이 없던 나 조차도, 그리고 멀리서 훈련을 하고 있던 병사들과 기사들 또한 모두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봤다.

'춤?'

검무라고 해야할까. 하얀 그녀가 은빛 검을 반짝이며 춤을 추듯 발을 놀린다. 잠시 올라갔던 오른 발이 아래로 내려오고, 검은 아래에서 긴 동선을 그리며 위로 향했다. 그 뒤 내려온 발을 축으로 한 바퀴를 돌며 올라갔던 검이 서서히 중단으로 온 뒤 돌아가는 그녀에 맞춰 회오리처럼 주변을 휘감았다.

'착각인가...'

점점 그녀의 주변이 새파랗게 변하는 것 같았다. 검에서 반짝이는 별빛같은 푸른 빛들이 은하를 이루며 세어나오고, 춤을 추는 것 같은 그녀의 주변을 맴돌며 천천히 주변을 장식해주는 비단처럼 노엘을 치장해준다. 마치, 여신이 즐거운 춤을 추며 별들과 노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게...뭘까.'

소름이 돋을 정도로 차갑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은 눈을 뗄 수 없는 광경이었다. 밤 사이 고요한 강에 뛰어들어 차가운 물 속에서 잔잔히 흐르는 별과 달을 바라볼 때 이런 기분일까. 위에서부터 흩날리던 남색 별빛들은 아래로 흐르며, 별똥별마냥 눈을 희롱했다. 다가가고 싶어 손을 뻗고 싶은 그런 느낌이었지만 다가갔다간 저 차가운 기운에 얼어붙을 것 같아 그저 지켜만 볼 수 밖에 없단 생각이 들었다.

'후우웅!'

마지막 칼바람 소리가 들리며, 그녀가 차분히 검 끝을 땅으로 내려놓는다.

"어땠어?"

어땠냐고? 찬사와 함께 박수 갈채를 보내고 싶었다. 그저 검을 휘두르며 움직였던 그녀는 분명 보기 좋으라고 했던 동작이 아니었을 것이다. 허나, 알 수 없는 남색 별들이 그녀를 수놓아, 은빛 검과 머리카락을 반짝였고, 사이사이 무표정했지만 숨길 수 없이 강렬한 그녀의 보랏빛 눈은 두 개의 달처럼 중심을 지켰다. 마지막 검이 마무리를 할 때 별들의 폭포가 일어나듯 무수히 쏟아지던 유성우의 향현은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이,이게 무엇입니까?"

"글쎄."

웃는 그녀. 모두가 그녀처럼 할 수 없단 것을 알게 되었다. 뒤의 병사들과 교관, 그리고 기사들마저도 멍하니 그녀의 검무를 바라봤던 것이 시야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크흠! 다시 하단 막기!!!"

교관이 뒤에서 크게 소리를 지른다. 퍼뜩 정신을 차린 병사들의 고함소리가 다시 들려온다.

"대답 안 해줄거야?"

"네?"

"어땠냐고."

볼을 부풀리는 그녀. 지금 그녀가 보여준 것은 가끔 시내에서 공연하는, 조잡한 장사치들이 터트리는 화약 폭죽 따위가 아니었다. 인간이 낼 수 있나?하는 그런 느낌. 소매치기의 특성 상 트릭을 만들고, 트릭을 해체하는 것이 전문이다. 그렇기에 잘은 모르지만 감으로 알 수 있었다.

'트릭이 아니야.'

진짜 그녀가 내는 알 수 없는 힘 같은 것이었다. 이야기가 하나 기억났다.

[흐흐, 재밌는 얘기해줄까?]

고주망태가 되어 길거리에 쓰러져있는 노인네가 말을 걸었다. 전에는 모험가였다, 잘나갔다 떠들어대는 슬럼가의 흔한 노인이었는데, 가끔 자신의 이야기를 떠들며 술을 조금씩 얻어먹는 그런 부류였다. 물론, 대부분 이야기를 해주곤 쪽박이나 차지 않으면 다행이었지만.

[가끔 검사로서 재능이 출중한 사람들 중에서는 검에서 기운을 뿜어낼 수 있다고 하지.]

동화 속에서나 나올 법한 이야기. 그 노인네는 술을 얻어먹기 위해 허풍과 함께 이야기들을 마구잡이로 꾸며냈다. 가끔 인과관계가 맞지 않아 이게 맞나?싶은 그런 이야기들도 마구 뱉어댄 그이기에 신뢰도가 없는 그런 조잡한 이야기.

[내가 모험가 시절 때...그런 것을 처음 보았지. 어떤 기사인지...아니면 어디서 나온 떠돌인지 몰라도 갑자기 검을 쥐다가 눈을 감는거야?]

싸움터에서 눈을 감는다? 그런 병신이 다 있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갑자기 녀석의 롱소드에서 푸른 빛이 퐉하고 나오는거 아냐? 놀라서 엉덩방아를 찧는 놈들이 부지기수였지. 물론 나는 베테랑 모험가였으니까 멀쩡했고...]

더 들을 필요가 없다는 듯 새벽 작업을 위해 나섰던 기억.

'진짜였나?'

검사들 중 검에서 이상한 기운을 뿜어낼 수 있단 이야기. 마법사들이 사용하는 마법처럼 그들만의 특별한 기술이 있다는 이야기는 들어봤지만, 자신과는 다른 딴 세상 속 이야기였기에 관심이 없었다. 내게 필요했던 기술은 소리와 감촉을 전혀 내지 않고 주머니를 칼로 벨 수 있는 기술이나, 도망칠 때 더 빨리 몸을 숨길 수 있는 기술이었으니까.

"이게 대체 뭡니까?"

난 바보처럼 눈 앞의 광경에 넋을 잃어 제일 원초적인 질문을 할 수 밖에 없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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